fnctId=bbs,fnctNo=18882 게시물 검색 검색하기 제목 작성자 RSS 2.0 총 게시글2 건 게시글 리스트 [김영교수님 / 한국일보 논담] "서울대 갑질, 모멸감 줘서 군기 잡는 전형적 노 새글 작성자 김아란 조회 2 첨부파일 0 작성일 2025.08.31 [김영교수님 / 한국일보 논담] "서울대 갑질, 모멸감 줘서 군기 잡는 전형적 노동자 통제"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이 시사하는 바는 참혹하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필수 노동자들이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얼마나 위험하게 일을 해왔는지, 그런데도 항변 못할 만큼 얼마나 취약한지, 그들의 노동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또 왜 이렇게 비인간적인지. 지하철 청소노동자와 초·중·고교 청소노동자를 면접조사한 김영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계층 격차가 심화하면서 차별을 당연시한다"며 "내가 향유하는 삶이 누구의 노동의 산물인지를 늘 기억하는 것이 시민의 도덕이고 의무"라고 말한다. 13일 그를 만나 서울대 사건과 대응, 코로나 시대 청소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물었다. "일 늘고 감염 공포 극심, 보호 관리는 전무"-코로나 이후 청소노동자들은 어떻게 일하고 있나.“지하철 청소노동자를 면접조사하면서 충격적이었던 건 평소에도 대합실에 싸놓은 분변, 토사물, 버려진 소변까지 치워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감염 공포까지 떠안는다. 마스크, 토사물, 가래 등이 모두 오염원이다. 노동강도도 크게 높아졌다. 평소 한 번 닦던 것을 하루 네 번씩 소독약 묻혀 닦고, 더운 여름에 마스크를 쓰고 일해야 한다. 조사한 청소노동자의 96.5%가 ‘내 일이 감염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고 응답했고 84.4%가 ‘일이 힘들어졌다’고 답했다.서울대 청소노동자의 사망도 과로사로 보인다. 급성 심근경색이 대표적인 과로사 질병인 데다 마스크를 쓴 채 무거운 쓰레기를 들고 움직인 게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서울대 학생 수가 절대적으로 많지만 코로나로 기숙사에 머무는 학생이 더 많을 것이다. 배달음식도 많았을 텐데 음식물 쓰레기가 포함되면 훨씬 무거워진다. 이사할 때나 쓰는 100리터짜리 봉투를, 찢어질까 봐 끌지도 못하고 들어서 4층에서 내렸을 것이다.그런데 놀랍게도 고용주나 용역업체 관리자가 일반적으로 노무관리를 전혀 안 한다. 애초부터 근무조건이나 노동강도를 파악하지도 않지만 한 번 닦던 것을 네 번으로 늘리면 얼마나 숨가쁘게 일해야 하는지, 노동자에게 얼마나 무리가 갈지 생각이 없다. ‘힘들겠지만 어쩔 수 없지’가 아니라 생각 자체가 없다. 소독액 희석방법도 알려주지 않아 진하게 써야 건강에 좋은 줄 알았다는 노동자도 있고, 강하게 쐐서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다고도 한다. 일하다 감염된 사례가 나왔지만 달라진 건 휴게실에서 각자 다른 방향을 향해 밥 먹으라는 게 전부였다. 좁은 휴게실에서 2m 거리 두기는 당연히 어렵다. 깐깐하게 수칙을 다 지키고도 감염된 한 노동자는 이후 출근하는 오전 4시 반부터 집에 도착하는 오후 4시 반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일한다.”-공립학교 청소노동자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후 노동환경이 개선됐나.“교육공무직으로 전환된 초중고교 청소노동자들은 잘릴지 모른다는 공포는 없어졌지만 처우는 같다. 오히려 이들의 노동조건이 일부 남아있는 용역 청소노동자보다 나쁘다. 탁상행정 때문이다. 교육청이 정한 원칙은 1교 1인 배치, 방학 중 비근무, 하루 6.5시간 노동이다. 하지만 용역 노동자는 한 학교에서 2명이 하루 7시간 일한다. 교육공무직 청소노동자는 둘이 할 일을 혼자 하는 셈이다. 한두 시간씩 일찍 출근하는 이유다. 방학 중 비근무라 해놓고 실제로는 청소할 일이 있으니 교장이 방학 동안 주 몇 회 나오라고 한다. 그것도 방학 직전에 알려줘 일자리와 임금을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 탁상행정을 바로잡을 만큼의 관심이 누구에게도 없다. 한 학교에 한 명뿐인 학교 청소노동자는 철저히 고립돼 노동조건을 비교하기도,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다. 대학은 그나마 많이 모여 있어 노조도 있는 것이다."-서울대 사건이 공분을 일으킨 또 다른 문제는 학교 안전관리팀장의 갑질이었다. 청소와 무관한 필기시험, 점수 공개, 드레스코드가 왜 필요한가.“2007년 장기간 싸웠던 뉴코아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사했을 때 회사에서 몸에 딱 붙는 블라우스를 입도록 해 물건을 들어올리고 내릴 때 찢어질까 봐 너무 힘들었다고 하더라. 더 속상한 이야기는, 회사가 아이섀도 브라운, 립스틱 빨강으로 화장 색깔까지 지정하는데 어느 날 분홍 립스틱을 바르고 가니 반장이 로커룸으로 데리고 가서 빨간 립스틱으로 그려줬다는 거다. 듣고 있던 내가 모욕감이 들어 울컥했었는데 서울대 이야기를 듣고 그게 떠올랐다. 멋지게 정장 입고 오라는 게 누구 눈에 멋진 건가. 부하직원들이 자기에게 예의를 갖추라는 것이고, 군기 잡힌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노동자를 통제하는 수단이다.고용주가 노동자를 통제하는 방식을 이론적으로 인격적 통제, 관료적 통제, 헤게모니적 통제로 구분한다. 헤게모니적 통제는 스스로 회사의 이념에 동의해 동참케 하는 것이다. 관료적 통제는 쉽게 말해 임금상승 규칙이다. 호봉 승급에는 인사고과가 따르게 돼 있고 이것이 굉장한 통제 수단이다. 하층 노동 시장일수록 임금상승규칙이 없고 최저임금 외엔 보상이 없다. 그러니 인격적 통제, 즉 갑질만 남는다. 일을 무리하게 시키느라 더 군기를 잡는다. 노동자에게 모멸감을 주어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죠’라고 생각하게 만든다.”-서울대 구민교 학생처장이 팀장의 이런 갑질을 관리자로서 할 일을 한 것이라며 두둔하고 청소업무가 많지 않았다고 반박하거나 민주노총의 문제 제기에 모욕감을 느낀다고 한 것이 더 충격적인데.“학생처장의 주장은 모두 말이 안 된다. 업무량이 많지 않았다고 주장하려면 장기간 업무 기록을 먼저 공개해야 한다. 안전관리팀장에게 인사권이 없다는 말은 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 사건을 다룰 때 늘 듣던 이야기라 화가 났다. 고용주나 임원이 ‘권한 없는 하급직 말을 왜 들었느냐’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청소노동자가 사장, 총장을 볼 일이 있나. 조직 위계에서 가장 밑에 있는 청소노동자는 바로 위에 있는 하급 관리자의 지시를 받고, 그가 상급 관리자에게 어떻게 보고하느냐에 따라 평가받는다. 제도적 인사권자가 따로 있지만 팀장이 실질적 인사권자다. ‘퇴근 복장 감사합니다’라는 청소노동자의 문자를 정말 고마워하는 걸로 해석한다면 권력이 뭔지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고 친절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권력이다.도덕적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발언이고, 계산적으로도 역풍을 예상 못한 점에서 어리석은 발언이다. 왜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교수라는 직업이 막 나가도 브레이크 걸어줄 사람이 없는 직업이라 그럴 것이다. 교수는 학생, 교직원에게 권력자로 존재하고 수업이나 학생지도 열심히 안 한다고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검열하고 성찰하는 기제가 없으면 이런 극단적 발언이 나온다.”-서울대가 유족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는 것을 보면(서울대는 이날 유감을 표명하고 구 처장을 보직해임했다) 구 처장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이런 발언이 보직 교수 입에서 나온다는 게 첫째로 서울대 총장과 집행부가 이를 허용하는 사람들 아닌가, 둘째 인권센터 조사에 영향을 줄 의도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서울대의 엘리트 의식도 작용했을 것이다. 학생처장이 안전관리팀장의 석사논문 지도 교수였고 직접 채용했다는 점에서 내 새끼라는 생각이 있는 듯하고 ‘훌륭한 서울대를 감히 우습게 봐’라는 태도가 엿보인다. 이때 진짜 서울대 명예를 지키는 길은, 책임 있는 사람이 나서서 ‘우리 학교에서 학생의 생활과 안전을 위해 일하시던 분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 죄송하다. 코로나 때문에 일이 많았을 수 있는데 충분히 살피지 못해 송구하다’고 밝히는 것이다. 어떻게 노조의 선동에 넘어갔다는 식으로 유족을 모욕할 수 있나. 서울대 안에 견제 세력이 없다는 게 문제다. 민교협(민주평등사회를 위한 전국 교수 연구자 협의회)이 문제 제기를 했으나 서울대 내에 그 숫자가 적다. 이런 사건이 터져도 목소리 낼 사람이 없는 시대가 되는 것이 우려된다.”-코로나로 격무에 시달리는 택배노동자 과로사 문제는 많이 이슈화됐지만 비슷한 처지인 청소노동자 문제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듯하다.“주로 여성들이 담당하는 노동은 흔히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한다. 청소노동과 돌봄노동이 그렇다. 사회 유지에 꼭 필요한 필수노동이고 코로나로 일은 힘들고 감염 위험은 매우 높은데 관심이 덜하다. 여자가 하는 노동을 폄하하고 금전적으로 보상을 안 하는 일반적 경향이 있다. 남성들이 주로 일하는 직종은 임금상승규칙이 있는 반면, 여성의 일로 통하는 청소·돌봄노동은 대체로 숙련도를 인정 안 해 근속수당도 없다. 독일에 가면 화장실 입구에서 청소노동자가 돈을 받는데, 혐오노동이라 부를 만큼 힘든 노동이라면 이처럼 돈을 많이 줘야 맞지 않나. 더욱이 스스로 밑바닥이라고 표현하는 청소노동자 안에서도 남녀 임금은 20%나 차이가 난다. 한국은 성별 임금 격차가 큰 나라인데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직종에서도 성별 격차가 있다. 성폭력 문화도 지배적이다. 용역업체 관리자가 ‘노래방에 있으니 나오라’고 전화해서 노동자가 ‘몸이 안 좋아 못 나가겠다’고 하니까 ‘내일부터 출근 안 해도 되겠네’라고 한 사례가 있다. 한 노동자는 남편이 죽었는데 말을 안 했다. 과부 된 사실이 알려지면 얼마나 성적 공격에 시달릴까 두려워 경조 휴가와 경조사비를 모두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런 중첩된 차별을 받는다. 그나마 서울대 청소노동자는 직접고용 상태이고 노조가 있는데도 갑질과 과로사를 막지 못했다. 주변부 노동시장의 노동자들이 얼마나 무권리 상태인지 드러난 것이다.”-코로나 팬데믹으로 평소 잊고 지내지만 우리 삶을 지탱하는 데에 꼭 필요한 필수노동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공동체 일원으로서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해야 하나.“청소노동자 죽음에 대한 서울대 대응이나 땅콩회항 같은 일이 왜 일어날까. 결국 계층 격차가 심화하면서 생기는 문제라고 본다. 격차가 커서 서로 소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면서 나는 명령하고 저들은 명령대로 움직이는 걸 당연시하는 게 아닐까. 사람을 차별하고 줄 세우는 것을, 승자독식을 당연시한다. 고득점자는 다 가져도 되고 저득점자는 짓밟혀도 괜찮다는 사고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민주화의 핵심은 먹고사는 것의 민주화다. 생존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인간으로서 존엄을 싹 내다버리는 상황이어선 안 된다. 품위 있게 가난할 수 있으려면 극단으로 내몰리지 않아야 한다. 심화하는 불평등이 한국 사회를 죽이고 있다.불평등을 당연시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사에 한번씩 반응해 조금씩 좋아지게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내가 향유하는 삶이 누구의 노동의 산물인지를 생각해 보라. 노동이 있어 세상이 있다. 이를 생각하는 게 시민으로서의 도덕이고 의무다.” [김영교수님/ 창작과비평 주간논평] ‘투명인간’이었던 어느 청소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새글 작성자 김아란 조회 2 첨부파일 0 작성일 2025.08.31 [창작과비평 주간논평] ‘투명인간’이었던 어느 청소노동자의 죽음 앞에서죽지 않고 일할 권리!일터에서의 어이없는 산재사망 보도를 보며, 생때같은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어머니들을 보며, 이 권리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일할 권리라니! 우리는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시간만큼 노무를 제공하기로 약속했을 뿐 고용주에게 신체포기각서를 건넨 적도 생명을 판 적도 없다. 우리는 고용주에게 우리를 살해할 권리를 판매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여러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사망한다. 고용노동부의 발표에 따르면 2020년 한해 동안 822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했다. 역대 최고다. ‘죽지 않고 일할 권리’라는 구호는 199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주요 투쟁전술 중 하나가 법을 지키는 것(준법투쟁)이었던 것만큼이나 비정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지난 6월말 또 한명의 청소노동자가 일터에서 사망했다. 서울대학교 관악학생생활관 925동. 여학생 기숙사 중 학생 수가 가장 많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건물에서 그는 공용공간을 청소하고 학생들이 배출한 음식물과 재활용쓰레기 6~700리터를 매일 계단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학생들이 기숙사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발생하는 쓰레기 역시 증가해 노동량과 노동강도가 폭증한 결과였다. 한여름에 다량의 음식물쓰레기가 포함되어 엄청난 무게였을 쓰레기더미를 옮겨야 했던 그는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고용주가 할당한 무리한 양의 노동과 신임 안전관리팀장의 억압적이고 모욕적인 행위들이 건강했던 그의 심장을 멈추게 했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2020년 하반기 지역별 고용조사」에 따르면 청소원 및 환경미화원 취업자 수는 1107천 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직업 소분류 중 4번째로 많은 4.1퍼센트를 차지한다. 고용노동부의 『2019년 고용형태별 근로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그 평균연령은 59.7세, 여성비는 70.5퍼센트, 평균근속년수는 3.4년, 월간노동시간은 150.1시간, 월 급여는 187만 5천원이다. 또 청소노동자 중 직접 고용 노동자는 27.8%에 지나지 않는다(성민재·안정화 「저임금 일자리의 동태적 변화와 정책과제」, 한국노동연구원 2016, 118면). 청소노동자는 여성, 중고령, 저학력, 간접고용 등 노동시장에서 차별받는 여러 요소가 중첩되는 ‘복합적 차별’의 상황에 놓인 대표적인 직업군이다. 그래서 본인들조차 자신들의 처지를 “(노동시장에서) 제일 밑바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서마저도 여성은 남성보다 임금을 20퍼센트 정도 적게 받는다. 청소노동은 차별받는 노동일 뿐 아니라 그 노동/자의 존재 자체가 인지되지 않는 유령노동이기도 하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빵과 장미」에서 한 청소노동자가 신입 동료에게 말한다. “청소작업복의 비밀이 뭔지 알아? 우리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거야.” 청소노동은 그 공간 사용자와 마주치지 않는 시간대에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시될 뿐 아니라(그래서 청소노동자들은 대부분 새벽에 출근한다), 심지어 이용자와 마주치지 말라는 지시까지 받는다. 이용자는 청소노동자가 일하는 것을 보더라도 못 본 척한다. 한 청소노동자는 교수에게 인사했더니 인사하지 말라는 면박을 당했다고 한다. 청소노동자는 의사보다 전염병 ‘예방’에 기여하는 바가 더 크다. 우리가 배출하는 온갖 쓰레기와 분비물을 처리하는 청소노동자들이 없다면 우리는 팬데믹의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청결과 위생이라는 청소노동의 결과물만을 향유하려 할 뿐 그것이 어떤 환경에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는지는 관심이 없다. 노동/자를 유령화한다는 것은 그 노동자들이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지에 무관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청소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받으며 고강도 노동을 할 뿐 아니라 휴게실이 없어 계단 옆, 창고, 심지어 화장실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팬데믹하 지하철 청소노동자의 노동경험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다(「복합적 차별과 코로나19 감염위험: A시 지하철 청소노동자의 팬데믹하 노동경험과 감염경험을 중심으로」, 『도시연구』 19권, 2021). 설문조사에 응한 지하철 청소노동자의 84.4퍼센트가 코로나19 이후 업무가 늘었다고 응답했다. 이전에는 하루 한두번 닦던 곳을 소독약으로 기본 네번씩 닦게 되어 일이 배로 많아졌기 때문이다. 소독약 과다 사용으로 청소노동자가 쓰러지기도 했다. 마스크를 하고 청소를 하다보면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여름에는 특히 힘들다. 불특정 다수의 이용객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일부 이용객의 비상식적 행위(노 마스크, 침 뱉기, 토사물, 승강장과 대합실의 대소변 등)의 결과물을 처리하며 극도의 감염공포(‘내 일은 감염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긍정 응답비율 96.5퍼센트)를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감염으로부터의 보호조치는 고용형태에 따라 크게 다르다. 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재택근무와 시차제 출근, 보호 가림막 설치 등 철저한 보호가 행해지지만 용역업체 소속인 청소노동자들에게는 “알아서 소독을 열심히 하라”는 지시뿐이다. 그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일하는 사무실에 물 한잔 마시러 들어가는 것조차 눈치 보이는 상황이다. 조사를 하면서 청소노동자에 대한 노무관리에는 요구와 지시만 있고 관리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고용주/관리자는 코로나19로 청소노동자들이 어떤 위험을 감당하고 있는지, 노동량과 노동강도가 얼마나 증가했는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청소노동자를 최저임금 도깨비방망이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일터에서의 급성심근경색은 과로사의 대표적 요인이다. 잠시만 생각해보면 코로나19로 청소노동자의 노동강도가 급증할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이번 일은 그 잠시의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아서 발생한 참사다. 유령에게 노동강도는 문제가 되지 않으니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2018년 서울대는 정부 정책에 따라 청소노동자를 직접고용으로 전환했다. 간접고용보다 고용안정성은 높아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2019년에 이어 다시 참사가 발생했다. 청소노동/자의 유령화가 중단되지 않는 한 이번이 끝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죽음을 마주해야만 비로소 노동자의 노동환경을 돌아보는 이런 어리석음을 우리는 언제 멈출 수 있을까? 노동자의 권리 부재는 사회의 민주적 질서를 침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차별이 행해지는 공간, 즉 불평등의 공간에 익숙해지는 것은 사회적 불평등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내가 이용하는 공간의 청결함과 안전함이 누구의 어떤 노동의 산물인지 묻지 않고 그 결과만을 향유하려는 태도가 ‘소비자의 권리’라는 말로 포장될 때 그것은 차별을 묵인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권리’란 다름 아닌 사회성원을 젠더, 고용형태, 학력, 연령에 따라 갈라 치고 차별하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차별의 칼날은 사회의 민주적 질서를 부식시키고 우리들 자신을 겨눌 것이다. 가장 취약한 지위에 있는 노동자/시민의 삶이 개선되는 것, 청소노동/자의 유령화를 묵인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들 자신의 노동하는 삶을 개선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이번의 불행이 일터에서의 차별과 억압적 노무관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근본적으로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서울대가 더이상 고인과 유족을 모욕하지 말고 교육기관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대응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비통한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처음 1 끝 처음 끝